관객리뷰단


제18회 경쟁부문 <혜영> 리뷰


“판타 레이!”

-<혜영>의 모순 화법-


<혜영>은 이별에 관한 영화다. 모레는 시험이 있는 날이고, 공부를 안 한 나는, 본 작품에 대해서 200자(요구한 최소의 기준)정도를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벽 두시고(나는 본 작품을 11시에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 그리고 몇 장면들을 다시 돌려봤다) 나는 시험공부는커녕, 애꿎은 애인을 불러 사랑을 확인하며 찌질대기 시작했었다.

잘 만든 이별 영화는 결국 나를 이렇게 찌질대게 만든다. 그리고 <혜영>은, 제길! 내 안의 지극한 감상주의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제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만큼 글이 지저분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더구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건 처량한 언니네 이발관이거나 흐릿한 이소라다. 사태는 심각하다. 부디, 리뷰어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먼저, 소름끼치도록 낯간지러운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소싯적 싸이클럽을 해봤다면, 당신은 ‘사랑해 앞에 생략된 말’따위를 읽었을지 모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생략된 말들은 아마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영원히). 그렇지만 당신이 겪은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하였는가? 그러니까, 오히려 ‘사랑해’ 앞에 생략된 말들은, (당신이 날 사랑하는 한), 그리고 (지금은)이 아닌가. “지금은, 영원히 사랑해”, “당신이 날 사랑하는 한, 무조건 사랑해”

사랑은 결국 모순-화법, 비슷한 것이다.


“판타 레이!” <혜영>의 성우와 혜영은 이렇게 인사한다. 판타 레이의 뜻은,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이다. 둘의 연애에는 후일의 이별이 공리로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둘의 날것으로서의 일화는 인물들이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즐겁다.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노골적인 점프-컷은 일화 안의 속도감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코믹 이면에는 둘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프로 야구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 혜영은 비판적이고, 성우는 편승한다. 또, 혜영은 그림을 그리고, 성우는 그림(만화)을 읽는다. 혜영과 성우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알레고리는 두 명의 동영상 취향이다. 혜영은 (소리로 추측컨대) 전쟁 영상을 자꾸만 탐닉한다. 성우는 모두가 알 수 있듯, 자꾸만 야동을 본다. 바로 타나토스와 에로스, 혜영이 죽음을 욕망할 때, 성우는 탄생을 바라본다.

더 나아가, 둘의 놀이는 언제나 한 명이 승리하면 한 명은 패배한다. 노골적인 차이의 알레고리에서 타협이 없는 둘의 관계는 자연스레, 이별을 생각하게 한다.

혜영이 가고파했던 구마모토에 홀로 가는 2부는 서사 자체로서 구동된다기보다, 1장의 흔적들로 기능한다. 2장을 알리는 간 자막에서 필흔이 된 것은 혜영이고 남아있는 것은 성우지만, 실제로 남은 것은 흔적뿐이다. 성우는 더 이상 야동을 보지 않고, 혜영과 함께 봤던 야구를 보고, 그녀가 가고 싶었던 구마모토로 떠난다.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연필 자국에는 가장 아름다웠기에 이제는 더없이 슬픈 노랫말들이 남아있다.

3장에서 혜영의 글씨는 완전히 지워지고, 그 자리에는 그녀를 웃겨주기 위해서 가져온 찬다라가 적혀져있다. 그러나 3장 역시 결국, 혜영을 그리워하는 성우의 이야기일 뿐이다. 흔적은 이제, 성우의 마음속에 인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성우는 1장에서 혜영이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을 회상하고 가정한다. 그녀가 집을 나서기까지, 코나 골며 누워있었던 그 날. 성우가 일어나서 혜영을 안아줬더라면, 비록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수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문까지라도 나가는 ‘타협’을 했었더라면. “판타 레임”, “데바림”이라며, 만화의 대사를 한 번 더 유치하게 따라하며 사랑의 영원 불가능성을 지각했었더라면, 그 둘의 사랑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영원하지 않았을까.


이제 성우에겐 혜영은 없다. 단지 그녀가 남긴 필흔만이 가슴 속에 인이 되었을 뿐이다. 길게 길렀던 수염이 다시 짧아지고, 일상은 굴러가지만 불현듯 바람결에 그녀의 노랫말이 들려올지 모른다. ‘바람아 멈추어다오’라고 간절히 불러 봐도, 바람은 불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사랑은 낡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판탈 레이!”라며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별은 준비를 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모두에게 정확한 양의 아픔을 준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이다.


사실, <혜영>은 서사를 제외하고도 원룸-쇼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카메라 위치와, 찬다라가 3장에서 휴지 하나를 내려놓는 등의 센스 요소가 많다. 그렇지만 <혜영>에 대한 가장 정확한 비평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뇌까리는 거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작품이 시작하고 브람스의 왈츠가 나올 때, 나는 본 작품이 시시할거라고 생각했다. 영화감독들은 대개, 너무 거장의 이름을 빌려오느라 자신의 작품을 시시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러나 <혜영>의 정서는 브람스를 감당한다. 이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재능 없는 내게도, 쇼팽에 어울리는 영감을 줄 것 같은 이별이란.



(제18회 대구단편영화제 관객리뷰어 금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