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우리가 유령일지라도
Even if We Are Ghosts
2026 | 극 | 29분 26초 | 애플시네마
소설을 쓰려고 노트북을 여는 윤영,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주인공과 입씨름을 하며 번번이 델리트키를 누른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름지기 진취적이며, 성장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사건이라도 겪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윤영의 주인공은 방구석에서 과자만 씹어댄다.
정하지 못한 장르,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장면전환. 이것은 윤영이 쓰고 있는 글, 크게 보면 윤영의 삶 속 문제이기도 하다. 윤영은 도무지 한 문장도 나아갈 수 없는 여백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을 이제 뚫어 보려 한다.
- 프로그램 노트
어둡고 눅눅한 지금을 살아가는 윤영은 현우 선배와 함께 울진으로 떠났던 마라톤 여행을 떠올린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개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던 그 선배는 어느 날 완전히 윤영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들, 달리는 사람들 속 멈춰선 나, 알 수 없는 불안에 잠식당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한바탕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방 안에 웅크려 있던 이영과, 완전히 떠나버린 현우가 윤영의 내면에서 처음으로 마주한다. 흰 바탕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끝없는 불안의 출발점이다. 비단 글을 쓰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막혀버린 삶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우리의 삶이 각자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때 누군가는 숨을 참고, 어떤 이는 반복되는 불빛들 사이를 박자로 쪼갠다. 자,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 내 안의 동굴에서 벗어날 시간. 일단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며, 이불을 빨자. 우리가 비록 (세상의) 유령일지라도.
제27회 대구단편영화제 예심위원 김세훈